본문 바로가기
방문한곳/유적지 찾아

▶덕주산성

by 청산-2 2014. 12. 14.

덕주산성

종 목 : 시도기념물 제35(제천시)

명 칭 : 제천덕주산성(堤川德周山城)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곽

수량/면적 : 일곽

지 정 일 : 1983.03.30

소 재 지 :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1-1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있다.

   신라 경순왕의 제 1공주 덕주공주가 이곳 월악산에 머물면서 지세를 이용하여 이 산에 성을 쌓고

훗날을 기약하였다. 그 후 이 성을 덕주공주가 쌓은 성이라 해서 덕주산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에 차단성의 기능을 지닌 이 성은

고려 고종 43(1256)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또 조선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

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둘레가 32670(9800m)에 이르렀던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동문·북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고,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다. 덕주골 입구에 있는 동문은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5겹의 성벽이 있는데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83330일 충청북도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었으며 제천시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월악산국립공원 남쪽에 있으며 성의 유구는 윗 덕주사를 에워싼 내성, 그 바깥의 하성과 조선시대

에 쌓은 남문, 동문, 북문 등 아치형의 성문 3개소만 남아 있다.

 

  북문 북정문(北正門)

  송계리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는데, 당초 계곡을 막았을 차단성의 성벽과 수구(水口)는 남아 있지

않다. 내외홍예를 갖춘 성문으로 초루(성 위에 세운 누각)와 여장(女墻:성 위에 활과 조총을 쏘는 구멍이나 사이를 띄어 쌓은 작은 성벽) 등 대부분의 석재가 유실되었으나 1997년 복원되었다.

  홍예마루돌에는 태극모형이 조각되어 있다. 이 성은 안팎으로 5겹의 성벽이 남아 있는데 그 축조

연대가 각각 달라, 성을 축조하는 방법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다.

주위에 민가와 창고등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눈살을 찌프리게만든다.

  덕주산성의 지붕형태는 서울의 숭례문이나 수원의 팔달문과같이 우진각지붕형태를 하고있는것이 특징이다.

 

   덕주산성은 북으로는 남한강을 끼고 남으로는 하늘재를 통해 남과 북을 연결 시켜주는 주요한 교통

요충지이며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로인해 통일 신라 말에는 중앙 집권세력이 미치지 않는 지방 분권적인 강력한 호족 세력이 이 지역에 나름대로 웅거하였을 가능성도 높다고 보여지는 곳이기도 하다.

   천혜의 지형 덕분으로 예로부터 유명한 피난처로 알려져 왔다.

   고려 고종 때 몽고가 대군을 몰고 충주성을 함락코자 하여 많은 충주사람들이 이 곳으로 피난 오게

 되었는데 김윤후장군과 용감한 충주민이 버티고 있는 충주성 공략에 실패한 몽고군은 달아난 충주민

들이 있는 이 곳 월악산성을 공격코자 하였으나 월악산 주변으로 갑작스럽게 안개가 자옥히 끼더니 요란한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쳐 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필히 월악산신이 노한 것으로 생각한 몽고군은 겁을 먹고 산성을 피해 문경을 넘어 상주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한다.

   임진왜란 때에도 충주와 주변 주민들은 떼를 지어 월악산성으로 난을 피해 몰려 왔었다한다.

왜군들 역시 월악산성만은 건드리지 못하였다하여 피난민들은 무사하였다고 한다.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있다.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에 차단성의 기능을 지닌 이 성은

고려 고종 43(1256)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또 조선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둘레가 32,670(9,800m)에 이르렀던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월악루), 동문(덕주루), 북문(북정문)3개 성문이 남아 있다.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고,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다.

  덕주골 입구에 있는 동문은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외 5겹의 성벽이 있는데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덕주산성 - 남문

위 치 :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월악산 남쪽 자락 일대는 남과 북을 잇는 도로의 길목으로 예로부터 전략적, 군 사적 요충지였다. 신라 경순왕의 제 1공주 덕주공주가 이곳 월악산에 머물면서 지세를 이용하여 이산에 성을 쌓고 훗날을 기약하였다. 그 후 이 성을 덕주공주 가 쌓은 성이라해서 덕주산성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덕주골로 들어가서 처음 만 나는 성벽이 외성이고 하덕주사에서 마애불을 향해 올라가다가 도중에 보이는 성벽이 내성이다.

   덕주산성은 삼국시대 때 월악산의 돌로 쌓은 성으로, 고려 때 몽고의 침입과 조 선조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해 수차례 파괴되어 현재는 홍문관만 남아있으며 누각이 없어진 석문에는 담쟁이넝쿨이 둘러져 있는데 조국을 지키고 나라에 충 성을 다한 옛조상의 얼과 넋 이 고이 잠들어 있는 듯하다. 현재 제천시에서 문화 재 복원사업으로 성곽 2,560m, 초루 3 동을 복원하였다. 

북정문

태극문양

남문(월악루)

동문(덕주루)

덕주루 안쪽

덕주루 성곽

 

망폭대

 

 

'방문한곳 > 유적지 찾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삿갓 묘를찾아  (0) 2015.02.18
오죽헌  (0) 2014.11.07
손병희 생가  (0) 2014.10.11
직지 박물관  (0) 2014.10.11
독립 기념관  (0) 2014.10.11

댓글